2009년 5월 29일 금요일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 이 글은 헹이채널에서 헹이님과 2008년 10월 1일 토론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나는 불가능하다고 봣다.

(PM 06:19:34) <yhpdoit> 음
(PM 06:19:41) <yhpdoit> 이게 행복을
(PM 06:19:45) <yhpdoit>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른데
(PM 06:20:11) <yhpdoit> 나는 행복을 스스로 한계선을 결정하고 그 한계선을 돌파하는 데 느끼는 감정이라고 정의햇습니다.
(PM 06:20:41) <헹이_새끼줄> 그건 희열이나 다른 단어와도 겹치는 정의 아닐까요
(PM 06:21:17) <yhpdoit> 희열도 행복의 일종이 아닐까.즉 그러한 것들을 행복 관점에
(PM 06:21:36) <헹이_새끼줄> 보통 행복이라는 게 저 상황에서만 느껴지는건 아니죠
(PM 06:21:40) <헹이_새끼줄> 저건 성취감이나 희열이라고 하는
(PM 06:21:45) <헹이_새끼줄> 아주 협소한 감정인데요
(PM 06:21:53) <yhpdoit> 아아 잠시 :) 한계선이라고 써놓으니까
(PM 06:21:57) <yhpdoit> 그렇게 생각하는거같은데
(PM 06:22:02) <yhpdoit> 한계선은 내가 만든 용어고
(PM 06:22:22) <헹이_새끼줄> 사람들에게 자기 생각을 피력할때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는게 우선아닐까요
(PM 06:22:22) <yhpdoit> 한계선이란 현재 상황이나 가치관에 따라 정해지는 만족의 요구치나 기대치를 나타내는 말로, 사람마다 다름...
(PM 06:29:40) <yhpdoit> 행복이 상대적이라면, 사람마다 그 상대적에 대한 기준선이 있을테고, 그 기준을 한계선이라고 부르는 거지염
(PM 06:29:51) <yhpdoit> 다른 용어를 생각하는 중..
(PM 06:29:55) <헹이_새끼줄> 그건 그냥 기준이라고 하면되요
(PM 06:29:59) <헹이_새끼줄> ㄱ-
(PM 06:30:11) <헹이_새끼줄>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 기준치
(PM 06:30:34) <yhpdoit> 음. 기준,요구,기대감,지표 에..
(PM 06:32:27) <yhpdoit> 아무튼 이럴때,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다는건 무의식의 영역인데, 애초에 그런 기준을 구별한다는 자체가 의식의 영역이고, 그걸 자각하는 것 자체도 의식의 영역이라고 보기 때문에 의식안에서의 행복을 주장함...
(PM 06:32:29) <yhpdoit> ㅇ_ㅇ;
(PM 06:32:52) <헹이_새끼줄> 그럼 존재로서의 행복은 없는건가?
(PM 06:33:02) <헹이_새끼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깨닫고 나니 그것이 행복이었다 따위의 문장은
(PM 06:33:06) <헹이_새끼줄> 성립이 안되는겁니까?
(PM 06:35:00) <헹이_새끼줄> 그럼 두잇형 의견은?
(PM 06:35:26) <yhpdoit> 그건 시점문제로 오류라고 봐. 즉. 과거 시점과 현재 시점의 기준의 변동한 거에 불과한 거지, 과거에 실제로 행복한게 아니라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의 자신을 투영햇을 때, 기준을 넘었던 거지. 근데 이 기준선이 과거가 아닌 현재의 기준으로 느끼는 거고 현재의 추억속의 행복이므로 현재의 행복이라고 봄

토론 중요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은 편집해도 너무 길으므로, 가려둡니다.

펼쳐두기..





대충 정리하자면 이런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기준을 A, 그 기준을 넘으면 행복이라고 합시다. A를 넘엇다는 것을 구별한다는 것 자체가 의식의 영역이고, 의식은 곳 인식이므로, 스스로 인식햇다는 것 그 자체입니다. 고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행복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과거 시점이면 어떨까요. 과거 시점에서 그때 행복했엇지 라는 생각은 현재의 생각입니다. 즉 현재의 A로서 판별된 내용이지요. 즉 현재에서 과거를 바라봣을때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를 판단햇을때 넘었을 뿐, 과거에 넘은 건 아니지요. 과거의 A는 현재와 다르므로, 과거의 행복이 아닌 현재의 생각 속의 행복입니다. 고로 현재 인식하면서 과거의 추억을 생각하며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므로, 현재의 행복이고, 인식한 행복입니다.

만약 이 주장에 의문점을 느끼신다면, 다음 사례를 반박할 수 있다면 전 수긍하겟습니다.
토론 끝나고 스스로 정리해 보면서 나온 사례입니다.

7월 1일, 사람 "가"는 A의 행동을 하였다. 가는 A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엇다.
7월 2일, 사람 "가"는 A를 생각하건데, A는 엄청나게 행복한 일이었다!
가는 행복감을 느꼇다.
7월 3일 사람 "가"는 A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A는 실제로는 엄청나게 불행하 일이었다.
가는 불행감을 느꼈다.

만약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하다면, A는 행복인가 불행인가? 이것이 단순한 사람 가 의 변덕인가? 아니다. 이런 일은 많이 있다. 즉 A의 행복 여부는 그것을 행한 7월 1일이 아니라, 7월 2일과 7월 3일에 결정났다.7월 2일과 7월 3일은 가가 명백하게 A의 행동을 인지하고 인식한 상태이므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행복은 불가능하다.




댓글 3개:

  1. 아무래도 논리가 좀 알쏭달쏭해서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예로 드신 것을 기반으로 저는 이렇게 풀이해서 이해했습니다.



    7월 1일의 "가"는 7월 1일에 일어난 A에 대해 감정이 없습니다.

    7월 2일의 "가"는 7월 1일에 일어난 A에 대해 행복을 느낍니다. A는 7월 1일에 일어났지만 이 행복은 7월 2일의 "가" 의 것입니다.

    7월 3일의 "가"는 7월 1일에 일어난 A에 대해 불행을 느낍니다. A는 7월 1일에 일어났지만 이 불행은 7월 3일의 "가"의 것입니다.



    A는 7월 1일에 일어났지만 "가"는 시간이 지남으로서 다른 생각으로 7월 1일에 일어난 A를 보게 되고, A를 다르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

    가"는 7월 1일에 A가 일어났을 떄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7월 1일의 A에 대해서 7월 1일의 "가"는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7월 2일의 "가"는 7월 1일의 A에 대해 행복을 느끼지만 이미 이 날의 "가" 는 7월 1일의 "가"가 아니게 되므로 "가"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논리의 의문은, 7월 1일의 "가"가 과연 7월 2일이나 7월 3일의 "가"가 될 수 없는 것이냐는 겁니다. 플레이포럼에서 어떻게 오게 되었는데, 즐겨찾기를 해두고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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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하슬러 - 2009/05/30 09:15
    아뇨. 조금 다릅니다. 제가 주장한 것은 같은 사람과 같은 사건인데,행복이냐 불행이냐 결정되는 시점이죠. 만약 그 행복이나 불행이 7월 1일에 결정되었다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7월 3일의 실례에서 보듯이 실제적으로 A의 행복 여부는 7월 2일과 7월 3일에 결정되었습니다. 이럴 때, 7월2일과 7월3일은 스스로 행복과 불행에 대해 인식하고 있던 상태임을 이미 가정으로 증명되었고요. 고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행복이 아니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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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엇.. 벌써 답글이.. 빠르신데요. 저도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아 다시 왔더니 벌써..



    동의하는 바입니다. 7월 1일의 "가"는 A에 대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후의 "가"의 행복 여부는 "가"가 다른 이로서 7월 1일의 A를 해석한 것이 되겠지요. 따라서 저의 의문은 제가 이 논리의 이해를 확실하게 하지 않음으로서 온 것이라고 하겠지요.



    :) 다음 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올라 올 경우에 한해서지만요(글이 올라온 날짜를 보니 블로그를 새로 시작하셨거나 잘 쓰시지 않으셨던 것 같아서 남기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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